그날 by 유카


그 성안의 온 곳이 조용했다. 사는 사람없이 버려진 성은 아니였다. 에루돈백작가의 성에는 그 큰성을 쓸고 닦고 정리하는 자잘한 일을 맡은 고용인과 성의 기사의 수가 100을 넘었다. 그리고 에루돈가의 가주와 평소엔 자신들의 집에 있었을것인 그의 몇 친척들이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성 전체가 다들 입을 닫기로 약속이나 한듯 조용했다. 친척들이 찾아온 뒤로 매일같이 가주의 집무실에서 들리는 고함소리와 화난 그의 삼촌이 집무실문을 쾅 닫는 소리, 입 가벼운 하녀들이 저들끼리 수군대는 소리 어느것 하나 들리지 않았다.
가주는 전대의 가주가 이른나이에 죽어 주위의 예상보다 일찍 가주자리에 오른 자였다. 약관을 갖 지난 어린나이였으나 그 총명함과 통찰력으로 전대 가주인 그의 아버지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었고 몇 친인척들은 내심 그가 국왕에 눈에 들어 가문의 이름을 더 강하게 만들어주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가 가주의 자리에 오르고 5년도 채 지나지 않아 그의 자리는 삐그덕거렸다. 겉보기에는 멀쩡했고 오히려 어린나이에 가주의 일-엄청난 양의-을 훌륭히 처리하고 있는 듯 했으나 그의 친인척들의 눈엔 그게 아니였다. 그들의 말에 따르자면 가주는 남색에 빠져 집무를 소홀히 하였고 가문의 대를 이을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으며 가문의 이름으로 제 배만 채울 궁리나 하고있다는 것이였다. 그것들이 진짜인가, 사실무근인가 그런것은 에루돈가 사람들에게 중요치 않았다. 그 말들은 수다 좋아하는 하인들에 의해, 가주의 자리에 오르고 싶어하는 몇 에루돈에 의해 여기저기 퍼져나갔고 정보에 밝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소문을 알고 있었다. 남색이라거나 제 배 채울 궁리만 하고있다는 얘기는 가문의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확인할수 없는 일로 이리 일을 크게 만든 주된 이유는 아니였다. 가주 자신이 독신을 고집하고 대를 이을 아이를 만들지 않는다는게 가장 큰 이유였다. 자신들의 이름이 더럽혀지는것을 두고 볼수 없었던 그의 친척들이 매일같이 그를 찾아와, 또는 성에 눌러앉아 어느 귀족 아가씨든 아내로 맞을것을 권유-를 빙자한 협박-을 했으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진실로 그렇게 할수 없었다.


에루돈백작가의 가주, 로난 에루돈은 현재 자신이 어느곳으로 가야하는 지도 몰랐으나 계속 달렸다. 그의 발 아래 깔린 붉은카펫은평소처럼 메이드들의 손으로 깔끔히 먼지가 제거된 뽀송뽀송한 채로 있었으나 몇몇 부분은 축축하게 젖은체 그가 발을 내딛을때마다 찌적찌적하는 소리를 내었다. 그는 축축해진 카펫을 밟을 때마다 몸서리를 쳤다. 피곤한 몸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수 없었다. 죄책감이 무겁게 그를 눌렀다. 대체 언제? 왜? 수많은 물음이 그의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가라앉길 반복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로난은 잠시 벽에 몸을 기대었다. 그가 달리는걸 멈추자마자 뒤따라오던 피곤들이 그의 몸에 다시 붙어 땅으로 끌어당기는것 같았다. 그는 결국 주저앉았다. 어제 밥부터 한숨도 자지 못한데다 동이 터오자마자 혼비백산하며 달렸다. 한숨섞인 헐떡거림과 함께 참았던 눈물이 터져나왔다. 모든 것이 그의 탓이였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믿었다. 가장 소중히 해야할 단 한 사람에게 상처를 줬고 외면했다. 결과적으로 그랬다. 어째서 손에 가진것을 놓아버릴수 없었던걸까. 어째서 그렇게 이기적일수 있던것일까. 그가 여태 한사람에게 품고있던 감정이 모두 거짓처럼 느껴졌다. 자신에 대한 큰 배신감에 죄책감이 심장을 꽉 조여왔다. 가슴이 답답했다. 로난은 아직 숨도 고르지 못했지만 다시 일어났다. 지금 이렇게 그사람을 찾아 달리는 것이 아주 조금이나마 그의 죄책감을 덜어줄것 같았다. 로난의 발걸음이 저택 중앙을 향했다. 그가 새벽동안 지금보단 덜했던 죄책감에 시달리며 밤을 새웠던, 그가 뛰쳐나온뒤로 한번도 들어가지 않았던 그의 집무실로 가는 것이였다.

5일 by 유카


이젠 언제였는지 생각나지 않는 어느날에 그가 들었던 촛대가 그대로 책상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러나 내가 만져볼수 있는것은 겨우 촛대뿐으로, 켤수 있는 방법은 몰랐다. 그는 어떻게 불을 켰을까. 사실 내가 전에 방을 훑어봤을때 성냥같은건 안보였고 그런걸 넣을만한 수납공간도 찾지 못했었다. 나는 책상 서랍을 뒤져봤지만 잉크병으로 생각되는 병과, 만년필과 종이 몇개뿐이였다. 촛대를 더듬거렸다. 성냥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면 촛대 어딘가에 답이 있으리라.
'달칵,'
촛대 가운데 부분 어느즈음 인가에서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버튼을 누르듯 손가락이 꾹 들어갔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촛대에 꽂힌 양초의 심지에 오렌지빛 불꽃이 올라왔다. 내가 놀라기도 전에 순식간에 방이 환해졌다. 촛대 어디엔가 성냥같은것을 넣는 수납공간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나에게 그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였다. 신기하게 촛대를 이리저리 돌려보던 나는 얼마안가 작동원리를 알아내는것은 포기하고 방을 돌아봤다. 내 뒤로 큰 그림자가 져있었다. 그는 어디 있을까. 어둠을 밝힐것이 있으니 어디든지 돌아다닐수 있을터였다.

내 손으론 딱 한번 열어보았던 큰 여닫이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주위를 휘휘 둘러보다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복도에도 카펫이 깔려있어 발소리를 죽일필요는 없었다. 묘한 설렘과 긴장감이 주위를 맴돌았다. 괜시리 방을 나와 있는것을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4일 by 유카



눈을 감고 있었다. 몸 전체를 둘러싼 몽롱함에 잠시간 그러고 있엇다.
"그 자세는 참 보기 않좋군."
고요함을 깨트리며 건네온 말에 눈을 번쩍 떳다. 살짝 찡그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꽤 편하단말입니다. 말을 삼키듯 꿀꺽 침을 삼켰다.
"원해서 그런건 아니라구요."
상체를 완전히 일으켰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방은 완전한 암흑에 휩싸여 있었다.
"이렇게 어둡게 해놔도 생활이 가능해요?"
픽, 그가 작게 웃었다.
"익숙해지면 뭐든지 가능한 법이지."
난 그가 있을법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붉은 색의 커튼은 틈없이 꼼꼼히 닫혀 어떤 빛도 내보이지 않았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빛을 싫어하세요?"
그가 바로 대답했다.
"아니."
"그러면 밖을 보기 싫으신 건가요?"
"아니."
"어둠속에 있는걸 좋아해요?"
"그런 악취미는 없네."
나는 더이상 물을 말이 없어졌다.
"그러면 왜 커튼을 쳐놨어요?"
그는 오랫동안 대답이 없었다. 내가 어둠속에서 조바심을 느껴 그 쪽으로 완전히 돌아앉았을 쯤에야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침을 보는게 싫어서.. 그랬네."
그의 목소리엔 말하기 싫었다는 듯 주저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나는 뜨끔했으나 후회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그의 눈동자가 보이지 않았으니.
"여긴 어딘가요?"
"누군가의 집이지."
"....그게 누군데요."
"자네일수도 있고, 나일수도 있지."
난 다시 침묵했다. 말해주기 싫은것인지, 그저 나를 놀려먹는건지....

3일 by 유카




몽롱하다. 잠이 덜깬듯 그저 뜨고만 있는 멍한 눈을 몇번 깜빡였다. 몇번 더 이곳에 와야 이 자세를 벗어날수 있을까. 방은 저번에 커튼을 친후로 더 만진적이 없는듯 빛 한조각 없이 어두웠다. 바닥을 더듬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내 기억이 맞다면, 정면에 책상이 있을테고 그 오른쪽 조금만 더 가면 커튼을 걷을수 있으리라. 몸 상태는 찌부둥하지만 양호한 편이였다. 첫날 내가 몸을 움직이지 못한것에 비하면 엄청난 변화라해도 무방했다. 무의식적으로 점점 이곳에 익숙해지는걸까. 허공을 짚으며 조금씩 앞으로 움직이던 내 손에 딱딱한것이 잡혔다. 정성스럽게 표면을 갈고 옻칠을 한듯한, 맨질맨질한 질감을 가지고 있었다. 책상을 짚은 나는 오른쪽으로 천천히 이동하며 다시 허공을 이리저리 더듬었다. 그리고 부드러운감촉의 커튼이 내 손끝에 닿았을때 나는 주저함 없이 그것을 당겨 걷어버렸다. 촤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어둠에 익숙한 눈에 강렬한 햇빛이 비췄다. 바로 태양이 정면에 있는듯, 붉은 카펫에 빛이 정확하게 내리 쬐었다. 고개를 돌리며 빛에 익숙해지려 몇번 눈을 깜빡이고 나서야 나는 모든것을 제대로 볼수 있었다. 아침이였다.
정원은 푸른 정원수들이 일정한 모양으로 미로처럼 배열되어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회색 벽돌로 지어진 높은 울타리의 테두리는 이름모를 꽃들이 촘촘히 심어져 있었고 울타리 가운데 큰 철창문 안쪽에서부터 이 방의 아래층까지 똑바로 잘 닦아놓은 회백색 돌길이 보였다. 이 방은 높이로 보아 3층정도는 될듯했다. 봄, 아니면 여름. 정원은 어제까지도 정원사가 정성들여 손질한듯 정갈했고 생기가 있었다. 유리창같은 발코니문은 잠긴듯 열리지 않았다.
그는 방안에 없었다. 커튼을 열때 그가 또 저지할까 생각했지만 방금 내가 이곳에 왔을때도 커튼을 열고 정원을 살펴본 지금까지도 그는 오지 않았다. 넓은 방 책상 앞으로 흑갈색의 큰 문이 있었다. 전에 그가 들어오고, 나갔던 문이겠지. 붉은 카펫은 책상뒤 커튼이 쳐져있는 두 발코니창 사이의 벽부터 시작해 문 아래까지 깔려있었다. 카펫 양 옆으로 카펫이 깔리지 않은 부분에는 반질반질한 회백색 대리석이 햇빛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방이 넓어 창이 큰편이였인데도 불구하고 빛이 적었다.  왼측 발코니의 커튼까지 걷어버렸다. 가장 먼저 왼쪽 벽의 장식용인듯 보이는 큰 무구가 놓여져 있었다. 은빛갑옷과 투구가 잘 닦여져 있는채로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짙은 갈색의 낮은 테이블과 그 주위를 둘러싸듯 반듯하게 놓여있는 베이지색 소파가 있었다. 손님 접대용의자인듯 했다. 소파 너머로는  문 옆 벽과 닿아있는 큰 책장이 있었다.

2일 by 유카



높은 천장.
붉은 카펫.
눈에 익었다. 또 그곳이였다. 언젠가 꾸었던 꿈에 나온곳이였다. 나는 똑같이 카펫위에 널브러져 있었고 똑같이 아침해가 떠있었다. 어쩌면 그가 있을지도.

이번꿈에서 그나마 내 마음에 드는것은 몸을 움직일수 있게 된것 정도. 손가락 몇개가 자유롭게 움직이자 나는 몸을 일으켰다. 편하진 않았다. 몸 여기저기 납덩이를 붙인듯 무거웠다. 혹시 모르지. 내가 처음 꿈을 꿨을때 나는 맞기 직전에 깬것이 아니라 그의 일격에 기절해버렸는지도. 꿈에서 기절한다는게 가능할지는 몰라도 이렇게 이곳저곳 몸이 아픈것을 보면 기절하고 계속 맞았데도 이상하지 않은것이다. 나는 커다란, 일명 사장님책상에 손을 짚고 간신히 일어섰다. 몸을 일으킬수 있게 되자 전번보단 많은 것들이 보였다. 예를들어 이 책상이나, 높이를 알수 없는 책장, 천장의 얼마안되는 햇빛을 받아 희미하게 반짝이는 샹들리에같은 것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고급스럽지 않은것이 없었다. 좀 더 보기위해 커튼을 걷어버릴 참으로 창문으로 걸어갔다.
"그러지말게."
덜 풀린 다리로 힘겹게 걸어가 커튼을 잡은 나는 또다시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어깨를 크게 움찔했다. 두번째라해도 거의 초면인 그 앞에서 창피한 모습을 보였다 생각하니 절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는 내 곁에 다가와 커튼을 뺏더니 햇빛이 나올 작은 틈까지 없애버렸다. 칠흑같은 어둠이 방에 가득찼다. 나는 그 어둠에서 잠시 보였던 그의 얼굴을 생각했다. 검고, 약간 긴 앞머리가 이마를 덮고 있었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입술은 무뚝뚝히 닫혀있었고 힘 없는 은빛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커튼을 닫곤 바로 방 어디론가 가버렸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그가 어디로 갔는지 내가 알수 있을리 없었다.

몇번 달그락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방 우측에서 촛대를 든 그가 나타났다. 노란색 눈동자가 날 보고 있었다. 왜 커튼을 열면 안되요? 여긴 어디죠? 당신은 누구예요? 목안에 여러가지 말들이 빙빙 돌아다녔지만 나는 그 눈이 마치 나를 묶어두기라도 한양 아무것도 할수 없었다. 방안에 무거운 기류가 흘렀다.
"왜 다시 왔나?"
앞머리를 끌다가 겨우 내뱉은 듯한 말투였다. 전에 보았던 분노는 많이 사그라들어 있었다. 분노보단 그 말속에 들어있는것은, 미련에 가까웠다. 그는 살짝 찡그리고 있었다. 대답이 없는 나를 책망하고 있는걸까, 그러나 난 대답할말이 없었다. 내 의지대로 온것이 아니였으니.
그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키가 거의 비슷했지만 나는 그를 살짝 내려다보았다. 촛대를 책상에 내려놓은 그가 내 뒷머리카락을 살짝 쓸어내렸다.
"머리를 잘랐군."
요 근래 머리를 자른적은 없고 난 짧은 머리 이외의 머리스타일을 한적이 없다. 나는 계속 침묵했다. 그에게 해줄말이 없었다. 그는 나를 누군가와 착각하는것이 틀림없었고, 나는 섣불리 그의 환상을 깨버릴수 없었다.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였건만, 말들이 목구멍을 빙빙 돌며 나오질 않았다. 나를 다른 사람과 착각하고 있다고, 그 사람은 내가 아니라고, 말할수 없었다.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그가 산산조각 나버릴것 같았다. 그는 마르지만 건장한 체격에 나같은건 멱살잡고 한손으로 들어올릴수 있으니 내가 신경써주지 않아도 될만큼 강한사람이겠지만 그와 동시에 깨질것 같은 눈동자엔 도저히 무시할수 없는 깊은 상처가 자리잡고 있었다.
원래는 은색이였을, 오렌지색 눈동자가 계속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대답하지 않는가? 됐네. 내 대답을 바라고 말한건 아니였으니."
상처는 온데간데 없고 건조한만을 담은 눈동자가 나에게서 멀어지더니 문을 열고 어둠속으로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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